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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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춤

탈과 탈춤의 기원

 원시 수렵과 어로생활에서 동물탈을 쓰고 위장하여 사냥의 성과를 올리는 한편, 사냥 성공을 기원하며 탈춤을 추거나 암각화에 새김으로써 그 염원을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증거가 되는 유물과 유적으로, 부산 영도의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가리비탈이나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암각화나 동굴벽화에서 수렵어로생활의 단면과 탈춤을 증명하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의 기악은 미마지味摩之가 612년 일본에 전한 탈춤이며 230여 종의 탈이 전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황창랑黃倡郞의 검무劒舞와 무애무無㝵舞 및 신라 오기五伎인 월전月顚·속독束毒·산예狻猊·대면大面 등과 처용무處容舞 등도 탈춤의 일종이다.
고려의 팔관회와 연등회는 신라 이래 연희되었던 가무백희로 그 내용은 『목은집』, 『산대잡극』과 『구나행』에서 살필 수가 있다. 조선조의 백희는 성현의 <관나시>, 송만재의 <관우희>, 동월의 <조선부> 등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탈춤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본산대놀이 계통 탈춤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가무백희·잡희·산대잡극·산대희 등으로 불리던 연희들인데,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산대도감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치던 반인泮人들이 18세기 전반기에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와 기존의 가면희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한 것이 본산대놀이이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산대희를 공식행사에 동원하는 일이 폐지되자, 산대도감山臺都監에 소속되었던 연희자들이 흩어져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민간에서 공연하면서 민중오락으로서의 오늘날 산대놀이 탈춤이 성립되었다.현전하는 탈춤은 크게 마을굿놀이 계통 탈춤, 본산대놀이 계통 탈춤, 기타 계통 탈춤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을굿놀이 계통 탈춤은 토착적·자생적 탈춤들을 가리키는데, 고을굿인 강릉단오제나 마을굿인 하회별신굿은 무당들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마을굿을 거행했다. 하회별신굿은 무당들이 주도했지만,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마을 주민인 농민들이 담당했다. 강릉단오제도 무당들이 주도했지만, 관노탈춤은 관노들이 놀았다.
본산대놀이 계통 탈춤으로 서울 근교의 가면극은 애오개(아현), 사직골, 노량진, 구파발 등에 있었다.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서울과 경기도의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퇴계원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경남의 수영야류·동래야류·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가산오광대·진주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생겨났다. 현재 애오개 등의 본산대놀이는 전하지 않지만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성립된 탈춤들이다. 그리하여 본산대놀이 계통 탈춤인 해서탈춤, 별산대놀이, 야류와 오광대 등은 각 과장의 구성과 연희 내용, 등장인물, 대사의 형식, 연극적 형식, 가면의 유형 등을 살펴볼 때, 유사성이 많은 동일 계통임이 드러난다.

[출처:한국민속예술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