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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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통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목상이나 석상을 가리키는 신목(神木)

마을의 수문신·수호신, 사찰이나 지역간의 경계표, 이정표(里程標) 등의 구실을 하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나무기둥이나 돌기둥의 상부에 사람 또는 신장(神將)의 얼굴 형태를 소박하게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등의 글씨를 새겨 거리를 표시한 신앙대상물이며, 보통 남녀로 쌍이 되어 마주 서 있다.장승은 동제(洞祭)의 주신(主神) 또는 하위신(下位神)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며, 솟대·돌무더기·신목(神木)·서낭당·선돌[立石] 등과 함께 동제 복합문화를 이룬다.문헌에 의하면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장생(長生)·장생표주(長生標柱)·목방장생표(木傍長生標)·석적장생표(石蹟長生標)·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국장생(國長生)·황장생(皇長生)이라는 기록이 보인다.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는 승[栍]·장승[長丞·長承·長栍]·장생우(長栍偶)·후(堠)·장성(長性·長城)·장선주(長先柱)·장선(長先·長仙)·댱승·쟝성·장신 등 다양한 명칭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최세진(崔世珍)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후를 ‘댱승 후’로 새기고 있어 ‘장승’이라는 명칭이 16세기 이후 일반적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현지 조사자료에 의하면, 전라남북도·경상남도 해안에서는 장승·장성·벅수·벅시·법수·법시·당산할아버지, 충청남북도에서는 장승·장신·수살막이·수살이·수살목, 경기도에서는 장승,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댱승·돌미륵,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우석목(偶石木)·옹중석(翁仲石)·거오기·거액 등의 명칭으로,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고 있다. 또한 전국의 장승유적 가운데 명칭을 장승·장성·장신으로 부르는 곳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벅수·벅시 등이다.장승의 기원은 고대의 남근숭배(男根崇拜)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사찰의 토지 경계 표시에서 나온 것이라는 장생고표지설(長生庫標識說), 솟대·선돌·서낭당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고유민속 기원설이 있으며, 또한 퉁구스 기원설·남방 벼농사 기원설·환태평양 기원설 등과 같은 비교민속 기원설 등이 있다.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고유민속 기원설과 비교민속 기원설이 함께 받아들여지고 있다.장승에 대한 기록으로는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비명에 신라 경덕왕 18년인 759년의 장생표주에 대한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그 뒤의 기록으로는 943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북도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의 장생(長生), 1085년(고려 의종 2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국장생석표(通度寺國長生石標),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道岬寺)의 국장생과 황장생, 1689년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승, 1725년의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 남원실상사석장승[南原實相寺石長栍] 등이 있다.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노표(路標)와 관련하여 후(堠)에 이수(里數)와 지명을 기록하여 10리·30리마다 후를 세우도록 법제화되었고, 이후는 노표 외에도 장생(長栍)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 등에는 후와 장생을 혼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이후 장승이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