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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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쌀과 그 부산물을 얻기 위하여 벼를 재배하는 농업.

조선시대의 벼농사고려 말 이전의 벼농사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우리나라 농서(農書)가 없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없다.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까지 중국의 『범승지서 氾勝之書』·『제민요술 齊民要術』·『사시찬요 四時纂要』·『농상집요 農桑輯要』 등의 농서를 수입하거나 『사시찬요』·『농상집요』 등에서 보는 것처럼 이를 국내에서 복간하여 이용해 왔다.따라서 고려 말 이전의 우리나라 벼농사가 어떻게 독자적으로 이루어져 왔는가 하는 기술적 내용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벼재배법은 1429년(세종 11)에 편찬된 『농사직설 農事直說』 종도조(種稻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농사직설』의 벼농사에 대한 기술적인 풀이를 보면, 원리면에서 오늘날의 재배법과 큰 차이가 없다. 예컨대, 씨앗 준비는 씨앗을 물에 담가 뜨는 것을 제거하고 건실한 것만을 골라 잘 말려두었다가 사용한다거나, 논에 가을갈이·봄갈이·객토(客土)·유기질비료 시용·볍씨 싹틔우기·모내기·중경제초 등의 각종 기술이 그러하다. 다만 오늘날과 크게 다른 것은 벼재배를 대부분 직파재배(直播栽培)로 했다는 점이다.직파에는 물이 있는 상태에서 온 논에 직파하는 수경(水耕, 水沙彌)과 마른 상태에서 직파했다가 우기(雨期)에 물을 넣는 건경(乾耕, 乾沙彌)의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오늘날과 같은 육묘이앙법[揷秧, 苗種]도 일부 있었으나, 이 방법의 풀이 말미에 “만일 큰 가뭄이 들면 실수하게 되어 농가로서는 크게 위험한 일이라(萬一大旱則失手農家之危事也).”고 경고까지 한 것을 보면, 모내기법은 수리조건이 좋은 곳에 한정시켜 재배했던 것으로 풀이된다.이 이앙법의 경우 『농사직설』에는 한 그루의 묘(苗) 수를 4, 5본(本)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보다 226년 뒤인 1655년(효종 6)에 편찬된 『농가집성 農家集成』에는 3, 4본으로 되어 있어 최신 기술에서 말하는 소주밀식이앙(小株密植移秧)의 원리는 이미 17세기 중엽에 우리의 선인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농사직설』이 편찬된 15세기의 벼품종은 ‘도종심다(稻種甚多)’라는 기록으로 보아 여러 품종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며, 더욱이 1492년(성종 23)에 간행된 강희맹(姜希孟)의 『금양잡록 衿陽雜錄』 곡품조(穀品條)를 보면 모두 27개의 품종에 관한 특성이 설명되어 있어 15세기에 이미 많은 품종의 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금양잡록』의 벼품종을 대별하면, 숙기에 따라 올벼 및 중생벼·늦벼가 있고 논벼와 밭벼, 그리고 메벼와 찰벼 등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벼품종은 재배기술이 개선되고 재배면적이 늘면서 품종 수도 계속 증가되고 있다.15세기의 27품종 이래 1700년(숙종 26)경에 편찬된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山林經濟』에는 34품종, 1798년(정조 22)부터 1799년 사이에 편찬된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 海東農書』에는 37품종, 1842년(헌종 8)부터 1845년 사이에 편찬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곡명고(穀名攷)에는 68품종으로 시대가 발전될수록 품종 수도 증가되고 있다.밭벼의 재배법은 『농사직설』에 밭벼 단작(單作)의 기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혼작(混作)도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밭벼 2, 피[稷] 2, 팥[小豆] 1의 비율로 섞어 혼파하는 양식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벼농사가 밭벼로 시작되었느냐, 논벼로 시작되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벼의 도입 경로로 북방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밭벼가 먼저라고 하고, 중부 및 남방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논벼가 먼저라고 하나 아직 정설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농사직설』의 기록에 논벼를 우선적으로 기록한 점, 밭벼는 벼재배의 9분의 1 분량으로 간략하게 기록한 점과 『금양잡록』의 벼품종에서도 밭벼는 2품종밖에 소개되지 않을 정도로 품종 수가 적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에는 논벼의 직파가 압도적이었으며 밭벼 재배는 극히 제한되었던 것 같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